
1. 22.06.24
건우는 연상인데, 문대는 연하라는 점이 좋아. 우연이를 다시 만났던 날부터 문대가 가장 조심하는 건 다름 아닌 호칭이겠지. 실수로라도 "우연아."로 시작하는 말을 해버릴까봐. 답지 않게 긴장하고, 조심스럽게 군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다들 데뷔를 앞두고 있고, 문대에 대해서도 많이 아는 건 아니라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문대도 점점 익숙해져서 내심 긴장을 풀었을 테고. 그런데 딱 한 번, 호칭 말고 다른 부분에서 실수를 했어.
그 날은 새로 발매할 앨범 컨셉을 회의하던 날이었지. 뭐라도 먹고 생각하자며 청우가 간식을 챙겨왔는데, 우연이는 싫어하는 간식이 섞여 있었던 거야. "아. 그거 안 좋아하세요, 형. 다른 거 없어요?" 문대 기준에선 당연한 일이었어. 그래도 6년 가까이 사귄 애인인 걸.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더 많고, 챙길 수 있는데 안 챙기는 성격도 아니니까. 그런데 다들 묘한 표정인 거야. 그도 그럴게 우연이는 조금 둔하고, 무던한 성격이라 그냥 주는대로 받아먹곤 했거든.
뭔가 실수를 했단 걸 알아차린 순간.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이 유난처럼 보일 수 있단 걸 알아차린 순간. 문대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어.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 최대한의 태연을 가장한 채 우연이를 바라봤겠지. "그렇죠?" 애써 물었는데, 우연이의 동그랗게 뜨인 눈이나 홧홧한 귓끝을 보곤 본능적으로 망했구나. 깨달아버려. 우연이는 문대의 팬이니까, 문대가 챙겨 줬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정신이 없었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 없다는 것도 모르고.
"문대문대, 잠시 나와봐."
이거 안 좋아했어요? 미안해요. 그것도 모르고. AR팀 직원들은 우연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른 멤버들은 새로운 과자를 꺼내오던 사이. 이세진은 문대를 데리고 탕비실 쪽으로 넘어갔어. 표정은 웃고 있지만 문대는 알았지. '아, 이 새끼. 지금 빡쳤네.' 아이돌 활동에 예민한 세진이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란 사실은 불보듯 뻔했거든. "문대. 누나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방금 대체 뭐야?" 혹시 연애에 관심을 두는 건 아닌가 싶어, 바짝 날이 선 말에 문대가 할 수 있는 답은 없었어. 그도 그럴 게….
1.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했던 거다.
2. 따지자면 전애인인데, 윤우연이 사귄 건 내가 아니라 류건우고.
3. 이게 뭔 개소리야. X발….
문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으니까. 이걸 설명하려면 회귀나 빙의 같은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데,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더러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리 없다는 걸 문대는 알고 있었어. 더군다나 상대는 '그' 이세진이고. 그래서 문대는 착실하게 변명을. 그러니까 거짓말을 지어내. "우연 씨가 내 팬인 건 유명하잖아.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물론 속으로는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말이었지. 그리고 세진이도 기억해서 말이야. 데뷔 앨범과 첫 활동이 끝나고 우연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문대에게 싸인을 받는 거였고, 팬들이 만든 문대 개인 영상을 보다가 테스타 멤버들에게 걸린 적도 있다는 거.
세진이가 흔들리자 문대는 쐐기를 박아. 지극히 상식적인 선 안에서 연애가 불가능한 이유를 덧붙였지. …자기 자신을 팔아서 말이야. 양심이 찔리긴 한다만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그리고 우연 씨 애인 있다." 문대가 뱉은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세진을 보면서, 문대는 '됐다. 이건 먹힌다.'라고 생각했어. 확신은 없었지만 우연이와의 대화에서 묻어 나오는 류건우의 흔적을 알고 있었거든. 문대는 최선을 다해 이성을 가장했고, 세진이는 정상적인 일반인의 시점에서 사건을 이해했어.
1. 우연 씨는 애인이 있다.
2. 박문대가 애인이 있는 사람을 건드릴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다.
3. 박문대의 팬사랑은 유난한 구석이 있지.
그리곤 곧장 문대에게 사과했지. "미안. 내가 예민했나보다." "아니다. 그럴 만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멤버들과 AR팀이 있는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문대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어. 풀리지 않은. 풀지 못한 문제를 다시 떠올려서 말이야. 이 세계에서의 '류건우'는 어떤 사람인가. 윤우연에게 어떤 인연으로 기억되고 있나. 이 미련한 마음을 차라리 온전히 끝맺을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입맛이 써. 발 밑이 새카매 보여.
하지만 어쩌겠어. 아직 그는 우연이와의 관계를 해결할 실마리는 커녕 시스템의 '미션'으로부터 살아남기 바쁜 걸. 또, 무엇보다도…. 이 상황, 아이돌 활동이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말이야. '정신 차려라, 류건우. 윤우연은 이미 지나간 인연이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 말을 부러 내뱉어. 그리고 상기해.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을. 그러면 조금 괜찮아졌거든.
그런데 이 사건 이후로, 우연이를 대할 때 실수하지 않으려 의식하는 바람에 도리어 들켰을 것 같지. 문대가 우연이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1. 22.06.26
사이가 좋은 A&R팀. 각자의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고, 서로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 팀 전체가 하나의 멋진 파트너일 것 같지. 무엇보다도 T1에서 실무를 위해 뽑아온 인재들인 만큼 다들 순박한 부분이 있을 거야. 정치질을 할 시간에 멋진 결과물 하나를 만드는 걸 더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다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잘 알아. 다음 활동곡을 준비하다가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소소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즐기거든.
그리고 어느 날에는, 우연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
처음 서두를 우연이가 시작한 건 아니야. 우연이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애시당초 잘 떠오르지도 않고. 다만 우연이의 선임 되는 직원이 결혼을 하게 되어서, 결혼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연애로. 연애 이야기를 하다 A&R 팀 내에서는 가장 어린 우연이에게까지 이야기가 번져 왔겠지. "우연 씨는 새로 애인 사귈 생각 없어?" 대수롭지도 않은 말에, 날카롭게 찔리는 건. 건우에게 사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믿는 미련한 마음 탓일까. 우연이는 잠시 입술을 뻐끔거려. 어떤 말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지. 아니. 그보다도… 그를 떠올리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색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거든.
우연이에게 언우에 대한 기억은 마치 호수와 같아서. 누군가 건드리면 파도처럼 쏟아지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르르면 잠잠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그러면 우연이는 그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갖지 못하지. 그 때의 자신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그 때의 자신은 무엇을 사랑했는 지.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수면을 사이에 두고 유리된 것처럼. 그래서 답을 고르지 못하고 유리잔의 표면만을 강하게 그러쥐고 있으면, 우연이와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뺏어가.
"아이 참. 지난 연애 그렇게 끝냈으면 한동안 쉬는 게 당연하잖아요. 우연 씨 박문대 씨 팬인 거 아시는 분이 무슨? 원래 팬들은 좋아하는 아이돌 생기면 연애운까지 다 끌어다 쓰는 거예요."
"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우연 씨 책상 안 본 사람 없는 거 알지?"
"다들 눈 가려주셔야죠."
그런데 맞는 말이잖아요? 누군가 동조하면, 다들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지. 우연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 인사를 전했는데, 그 찰나에 녹음을 기다리고 있던 문대와 시선을 마주쳤어. 아? 하얀 눈을 깜빡이는 우연이와,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문대. 간극.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선배는 깔깔 웃음을 터뜨려. "세상에. 문대 씨 언제 오셨어요? 우연 씨 좀 잡아가세요!"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우연이의 귓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지.
한편 문대는, 심기가 불편했어. 다들 티벳 표정을 짓는 문대를 보며 팬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며 놀리지만, 기실 문대가 신경 쓰는 건 다른 거겠지. 잠깐 스쳐 지나간 주제. 그러니까, 윤우연의 전 애인이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는 순간 얼어붙었던 우연이의 표정을 알아. 슬픔과 어려움, 외로움 따위로 엉망이 된 표정 말이야. '망할 시스템.' 속으로 욕을 되뇌인다 한들 해결되는 건 없었지. 그래서 되려 태연을 가정했어. 우연이에게 건우가 아픈 기억이라면, 차라리 떠올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깐 사이에, 이세진이 합류함과 동시에 대화의 장은 우연이의 '전애인'으로 넘어가 있겠지. 원래 찝찝한 마음 같은 건 욕하면서 푸는 거라고 외치는 통에 휘말려서, 우연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을 거야. 하나 둘 합세한 멤버들과, 같이 듣는 팀원들. 다 같이 한 입으로 우연이의 애인에 대해 욕을 하는 와중에 문대도 합세하고 말아. 자기가 자기를 디스하는 이 상황이 웃기고, 어이 없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우연이가 그 그림자를 떨쳐냈으면 싶었거든.
"누나. 그런 사람은 잊고 이제 우리만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아이돌과 멤버들에게 둘러쌓여서 탈덕은 안 된다. 우리 작업 신경 써달라. 청탁 아닌 청탁, 뇌물 아닌 뇌물을 수수 받으며 우연이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어 가. 가장 큰 타격은 아기 강아지처럼 순한 눈을 한 채 자기만 봐달라고 하는 문대였겠지. "...전 이제 문대 씨 뿐인데." 비명처럼. 상황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뱉은 말은 강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어. 유진이가 휘파람을 불고, 모두가 정적에 빠진 사이. 문대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 그도 그럴 게... 팬 사인회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잖아.
"...저 기절해도 될까요?"
그 한 마디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려. 우연이는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발 끝을 동동 굴렀지. 겨우 정신을 차린 문대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태연하게 답했어.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간 키워온 아이돌 자아가 대신 답을 한 꼴이었지만 뭐, 나쁘지 않으니까. 문대가 자신을 합리화 하는 동안, 우연이는 딱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 너무 긴장해도 울 수 있구나. 새로운 사실도 알았고 말이야. 한참을 더 웃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청우 덕에 상황은 겨우 중재되었고, 점심 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은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나. 초라해진 우연이만 모든 기력을 쓴 나머지 오후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