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영원하지만, 사람은 닳는다.
이 모든 비극은 불현듯 깨달은 어떤 명제로부터 비롯됐다.
류건우는 필름을 생각했다. 어떤 한 사람의 생애를 단 1시간 분량의 편성안에 밀어 넣으려는 시도였다. 평생을 가로지르는 건데 그 정도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던 생각과 달리 막연히 정한 목표는 꽤 까마득한 구석이 있었다. 서른둘 남짓한 삶에는 그리 쓸만한 컷이 많지 않던 까닭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던가, 홀로서기를 자처했다던가. 익숙한 신파에는 께름칙한 구석이 있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는 흥미나 감동이 없었다. 그렇게 돌이켜 보면 이 삶의 장르는 의외로 로맨스에 가까울지도 모른단 생각이 찰나. 남자는 몸을 뒤척이는 여자의 마른 뺨을 느리게 문질렀다. 작은 침음을 흘리며 다시금 얕은 잠에 잠겨 드는 이는 그의 삶에 가장 큰 파편이었다. 얇은 눈가가 울긋불긋하게 진물인 자국이 시선을 매었다. 처음 그를 알았을 적까지만 해도 부재하던 우울의 잔재였다. 건우는 몸을 기울여 우연의 동그란 이마 위로 조심히 입을 맞췄다. 어쩐지 끔찍한 기분이었다.
변명. 애틋한 이를 살라 먹은 우울에 감히 변명하자면 도통 나아지질 않는 삶이었다. 한때의 여름 장마가 아직도 선명하니 사랑이 바랬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단지 나아가려 할수록 밀려나는 삶이 버거웠다. 때때로 약을 받기 위해 만나는 정신과의 의사는 인생이란 게 롤러코스터와 같은 면이 있어 굴곡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하던데, 그의 최고점은 언제나 우연이었고 최저점은 항상 이전보다 더 깊은 바닥이라 문제였다. 발버둥 쳐봐야 나아질 일 없어 보이는 생애에 숨이 막히는 날이 늘었다.
수렁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달라질까. 그런 의문에 류건우는 때때로 과거를 반추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지 가늠할 수만 있다면 이토록 무력하진 않을 성싶었으나 까마득한 구덩이는 어둡기 짝이 없어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그 자체로 무기력했다. 짓눌린 것처럼 느리게 뛰는 심장에 덜컥 숨이 막힐 때면 그는 살기 위해 윤우연을 찾았다. 자그마한 연인을 끌어안고 마른 목덜미에 뺨을 비비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여서. 차게 식은 몸을 덥히는 미적지근한 열기를 느낄 때면 그렇게라도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어서.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의지한 것. 여리고 예민한 사람에게 자신을 투신하고, 그리하여 그가 기꺼이 사랑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
사랑이란 뭘까. 애당초 이토록 불우한 것을 사랑이라 포장해도 괜찮은 걸까.
언제부턴가 류건우는 사랑이 어려워졌음을 시인한다. 그의 곁에서 앓는 윤우연을 볼 때마다, 행여 그가 사라질까 겁에 질려 손을 잡지 않고선 잠에 들지 못하는 연인을 볼 때마다. 이유를 불문하고 쏟아지는 울음에 자기 자신조차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선 그를 더러 사랑이라고 부르는 행위 자체가 모욕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게 어떻게 사랑일 수 있단 말인지 그는 도저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아.”
그럼에도 그는 윤우연을 사랑했다.
“윤우연…….”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 여기에 있었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머리카락, 끌어안으면 품 안 가득 차는 몸. 코끝을 간질이는 섬유유연제 향과 곧게 오르내리는 숨소리. 무엇 하나 싫어해본 적 없는 삶의 흔적들. 이토록 기울어진 모순을 그는 알지 못했다.
“사랑해.”
그래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해서 더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곪아버린 마음에 닳도록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류건우는 내내 속으로만 삭히던 단어를 조용히 입 밖으로 밀어내며 소원했다. 오늘은 네가 울지 않기를. 오늘이 부디 네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기를. 하루라도 빨리 너를 놓아줄 수 있게.
말아 쥔 손톱에 손바닥이 패였다.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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